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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2 Ready Set Go 4
  2. 2008.07.03 어렸을적.
  3. 2008.05.19 가끔.. 2
  4. 2008.04.05 상처
  5. 2008.03.11 가끔은 살아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하곤 해요.
  6. 2008.03.10 [연작3] 무제
  7. 2007.12.26 편의점 천국 편의점 지옥 1
  8. 2007.11.30 .. 2
  9. 2007.11.05 DECAPITATED and IMPALE 8
  10. 2007.10.10 문자와 목소리 8
  11. 2007.09.02 헛소리. 4
  12. 2007.08.06 산에 가면...
  13. 2007.07.27 명박이 아저씨 한 숨 놨네 4
  14. 2007.07.24 gloomy today 2
  15. 2007.07.07 Sex in TV 6

Ready Set Go

Posted 2008. 12. 22. 22:21

지난 한달간 기간은 내가 생각해도 참 기이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아마 한달동안 밤에 잔 시간보다 아침이나 점심 때 잔 시간이 훨씬 많았을거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정신이 들었고. 그렇게 나 자신을 혹사시키다가 아침 10시 더하면 오후 1시에 자는 생활이 계속 반복됐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자신을 더더욱 잘 알 수 있었는데. 그게 참 더 괴로웠다. 어쩌면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내 마음과 현실적으로 흘러가는 내 자신이 끈임없이 상충하며 내 자신을 고문해온 것 같다. 그렇게 괴롭던 순간.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내 상황은 변한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알 거 같다. 그냥 내가 하는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그 것이라는 거. 나중에 후회없이 하자. 이걸 꼭 해야된다. 이렇게 내 자신을 압박하면서 지내봤자 결국 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거. 그럴바에는 차라리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같은 생각은 안 하련다. 그냥 나를 조금 풀어주고. 그냥 지금 놓여져있는 상황에 순응하면서 흘러가야겠다.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주제껏 한다는 말이다. 꼭 지금 선택한 삶이 나중에 돌아봤을 때 최선이라는 보장도 없고. 잘못 흘러간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제대로 흘러가는건지 어떤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련다. 마음 편히 그리고 그냥 자연스럽게.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음 졸이지 말자.


어렸을적.

Posted 2008. 7. 3. 17:18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거다. 아니 1학년에서 3학년 사이인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하여간. 그 때 우리집에서 학교까지는 10분거리였는데. 가끔은 학교 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오기도 했다.

겨우 한 정거장밖에 안 됐지만.

그리고 그 버스 정거장 앞에서는 여느 학교나 다 그렇듯.

초등학생들의 푼돈으로 장사를 하는 가게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뽑기는 아이들에게 정말 인기만점이었다.

뽑기는 대부분 기껏해야 100원~200원가량 했는데 정말 럭셔리한 500원짜리 뽑기 기계가 하나 있었다.

500원짜리답게 거기 있는 상품은 대부분 멋지고 판타스틱했지만 간혹가다 100원짜리보다 못 한게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 기계에 500원을 넣고 뽑는 것을 마치 심판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범죄자마냥 긴장하며

손잡이를 돌리곤 했다.


그리고 난 항상 그 옆에서 뽑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손에 꽉 쥔채로.

그 당시 500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1000원짜리 한장만해도 거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500원을 쓴다는 것은 앞으로 내가 가질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였다.

전문용어로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

그래서 난 항상 뽑기 앞에서 다른 아이들이 뽑기 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30분이 넘게 서있곤 했다.

그리고 결국은 뽑기에 동전을 넣었다가 다시 빼내고는 집에 가버렸다.


어쩌면 그 일은 앞으로의 내 인생을 결정지어줄 중요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 인생의 복선이 되는 한 장면이었을 거다.

난 아직도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꽉 쥐고는 다른데에 쉽사리 쓰지 못 하고 있다.

남들이 500원짜리 동전으로 뽑기를 해서 기대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기도 하고, 100원짜리도 안 되는 게 나온 걸

보면서 후회하는 모습을 구경만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난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위하고 있다.

하지만 동전을 쓰지 않으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멋있는 장난감이나 설사 쓰레기보다 못한 장난감이라도 난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면 결국 뽑기기계는 텅텅 빌 것이고.

난 또다시 다른 기계 앞에서 시간을 보낼 거다.

다른 아이들이 뽑기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끔..

Posted 2008. 5. 19. 20:15

정말 막 보고 싶고..

막 연락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은 그냥 관두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25년간 살고 보니.

앞으로 그러지 말고. 마음 가는 데로 살자고 생각하는데..

25년간 해왔던 버릇을 선뜻 쉽게 놓아버릴 수가 없다.

결국 난 또 앞으로 25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기간 동안 변하지 않을 거 같다.

아니 변하지 못할 거 같다.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외로울 때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일 땐 그나마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국 나 혼자서 걷고 있더라...

상처

Posted 2008. 4. 5. 00:34
'앗 따거'

 손가락을 보니 검지 손가락 첫마디에 빨갛게 피가 묻어 있다. 또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어디에 긁힌 모양이다. 언제 다쳤는지는 몰라도 벌써 피는 굳어서 말랑말랑한 딱쟁이가 되고 있었다. 지난 주에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손등을 다쳤으니 벌써 이런 일만 두번째다. 요즘 이상하게 다치는 순간에는 아픈 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그제서야 비로소 다친 걸 깨닫는다. 아니면 남들이 왜 다쳤냐고 물어보는 바람에 그제서야 깨닫곤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설사 그 순간에는 다친 걸 모른다 할지라도 금새 상처를 확인하고 치료할 수 있다. 또 금방 다른 사람 눈에 띄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설사 가벼운 빈말이언정 위로의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는 그렇지 않다. 다치고 나서도 자신이 다친지조차 모르고 지내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려오는 느낌으로 다친 걸 깨닫게 된다. 또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나의 상처에 관심 가져주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 꿋꿋이 응어리진 상처를 치유해야한다.

 다들 이런 생채기 하나쯤은 가슴에 묻고 살 것이다. 너무 아파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치료받고 싶지만 그 상처가 너무 흉해서 선뜻 남에게 보여줄 마음이 내키지 않는 그런 상처를 말이다. 조금은 생뚱맞지만 이런 이유로 드라마 "쩐의 전쟁"에 나오는 하우젠이 이렇게 말했는 지도 모르겠다.

"누나 가슴에 삼천원쯤은 있는 거에요!"
가끔은 살아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하곤 해요.

살아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인걸요.

전 살면서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저의 삶은 축복 받았는걸요.

저의 어제와 오늘, 내일은 모두로부터 열려있어요.

전 그 모든 가능성에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사는 걸요.

저의 매일 아침은 항상 새로워요.

절 이 세상에 놓여있게 해준 그 모든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에요.

전 항상 살아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하곤 해요.

가끔은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죽을만큼 후회될지라도 말이죠...

[연작3] 무제

Posted 2008. 3. 10. 03:41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다들 아마 한 번쯤은 상상해보려다가 자신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두려움 속에 지레 겁먹고는 상상 속세계로부터 도망쳐 나왔을 거야. 죽음이란 단어는 정말 무시무시한 단어지. 모든 어둠과 악한 기운을 담고 있기도 해. 하지만 죽음 뒤의 세상이 아무 것도 없을 거라 생각하면 오히려 그 곳이야 말로 깨끗한 곳이 아닐까.

 낙서 하나 되어있지 않은 새 도화지를 펼쳐놓은 것과 같은 백색의 세계를 상상해봐 물론 거기에서는 색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 하겠지. 검은색, 회색, 흰색 모두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이 되는 세계, 그 곳이 바로 죽음 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일 거야. 상상해봐 이런 세계를. 그 곳에서는 어떠한 고통이나 슬픔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아. 그 곳에서는 고통, 슬픔, 행복, 쾌락 모두 그 의미를 잃어버릴 거야. 선악, 명암 그 모두가 무의해. 혹자는 그 공간 위에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를 내려다볼 거라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거기는 위아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아. 거기서 신도 예외는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불안해지려나?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봐.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시키면서 한 번만 더 생각해봐. 그 곳은 지상낙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옥의 구덩이도 아니야. 우린 더 이상 고통 받을 필요도 없어. 그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그 곳으로 빨리 가자 이런 말이 아니야. 그냥 그 곳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자는 거지.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자 이거야.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존재이고, 그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편의점 천국 편의점 지옥

Posted 2007. 12. 26. 16:54

 어렸을 때 집 근처에 로손이라는 편의점이 생긴 적이 있다. 그 당시 편의점은 너무나 신기한 곳이었다. 팝콘을 사서 곧바로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을 수도 있고, 일반 슈퍼에서는 팔지 않는 샤베트 류의 음료수를 팔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의 물건은 똑같이 슈퍼에서 파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슈퍼보다 가격이 비쌌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몇 번 가던 편의점은 곧 식상해졌고, 점점 편의점은 비싼 곳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편의점에 가는 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얼마 뒤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그 편의점은 곧 문을 닫고 말았다.

 요즘 집 밖을 나가보면 정말 편의점 천국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한 블럭 간격으로 골목 모퉁이에는 어김없이 편의점이 들어서있다. 그 종류도 패밀리 마트, GS25, seven eleven, ministop, by the way 등으로 다양하다. 편의점이 이렇게 많아지게 된 배경에는 편의점의 피나는 노력이 숨어있다. 가격으로는 일반 슈퍼와 경쟁이 되지 않던 편의점들은 이름 그대로 편의성으로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편의점은 일반 슈퍼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들을 팔고,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나아가 택배 서비스, 공과금 납부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고, 현금인출기를 설치해 늦은 밤에도 현금을 찾기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핸드폰 할인카드 제휴 등을 통해 슈퍼와 가격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슈퍼가 안일하게 가격경쟁력만 믿고 방심하고 있는 동안 편의점은 살아남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사는 곳 근처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편의점 수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무리 편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편의점들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과다한 공급에는 그에 상응하는 수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빽빽히 들어서있는 편의점에 그만큼의 손님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스턴트 식품은 그다지 즐겨먹지 않아서 편의점을 잘 이용하지는 않지만 가끔 정말 급하게 끼니를 해결해야할 때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곤 한다. 최근 모 블로그에 올라온 글에도 혼자 밥 먹기 좋은 곳으로 편의점을 뽑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자 밥 먹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이 존재한다. 모두들 끼니만큼은 누군가와 같이 먹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혼자 먹어야만 할 때는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만나는 걸 꺼려한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 원룸이 즐비하게 들어선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방방마다 자신만의 둥지를 만들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들에게는 누군가와 만나 간단히 밥 한끼를 해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 편의점은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비록 건강에 썩 좋지는 않지만 가볍게 끼니를 때우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누군가와 만날 걱정이 없는 편의점이야말로 이런 '코쿤족'의 성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아마 나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편의점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잘 이용하지 않는 것 뿐이다. 솔직히 나에게 '코쿤족'같은 생활은 더할 나위없이 편하고 포기할래야 포기할 수 없는 생활이 되어버렸지만 가끔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독신아파트가 늘어나고 그들을 겨냥한 상품이 나오고 있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혼자일 때 진정 편할 것일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

Posted 2007. 11. 30. 23:21

모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말자.

DECAPITATED and IMPALE

Posted 2007. 11. 5. 16:06
※혹시나 비위 약한 사람은 읽지 마세용


"서걱."
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과를 자를 때도 어느 정도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칼과 사과 사이의 마찰로 소리가 나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이 건 마치 마가린이 썰리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처음부터 두렵진 않았다. 왜냐면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가 특별히 다른 것같지도 않고. 내가 앞으로 죽는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야 겠다는 생각도 없이 머리는 하얗게 비워져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고통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하반신이 전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발을 움직이려고 하는 의지는 전달하고 있으나 내 발은 거기에 대해 어떠한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프다는 느낌은 전달되었다. 모든 감각이 뭉뚱그려져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손이 칼에 베었을 때나 뼈가 부러졌을 때 느끼는 감각하고 비슷했지만 그 어느 것도 지금 느끼는 고통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누가 내 살을 수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울고 싶었다. 무서웠다. 내가 지금부터 죽는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죽기 싫었다. 살고 싶었다. 내가 왜 죽어야한단 말인가. 이 상태로 병원에 간다면 누군가 감쪽같이 내 몸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만 가면 된다.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 생각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머리 속이 다시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느꼈던 느낌과 조금 달랐다. 나른하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졸릴 때와 비슷하게 정신이 멍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참을 수 없는 잠 속으로 나는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나는 죽었다.

오늘 미기 시간에 갑자기 내 몸이 반으로 잘리는 생각을 했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끔직한 일이다. 영화 큐브를 보면 방 안에 들어간 사람의 몸이 대략 몇백등분 되는 장면이 있다. 수백개의 칼이 몸을 지나가면서 몸을 썰어버린 건데 마치 블럭쌓기 하다가 무너지는 것처럼 몸 덩어리가 땅으로 떨어진다. 그 거 보면서 토할 거 같았다. 이런 생각이 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이 반으로 잘리는 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게 생각난 걸까?


"푹"
아마 이런 소리였을 거다. 사실 이 소리를 글자로 표현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몸이 뚫리면서 나는 소리를 어떻게 묘사하냔 말이다. 원래 강한 고통을 전해주는 강력한 충격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순간 아무런 느낌이 없다. 하지만 이 건 달랐다. 내가 입은 상처만큼 강한 충격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마치 가슴을 전기심장자극기로 자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 충격으로 내 몸이 튀어오르기는 커녕 오히려 완전히 마비되어 버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마비된 몸은 전기가 오르듯이 짜릿짜릿했다. 그리고 그 전율은 점점 강력한 아픔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몸에 뚫고 나온 말뚝과 내 살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심장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피는 화산의 용암이 흘러내리듯이 나오기 시작했다. 피를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느새 아픔은 잊어버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살고 싶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현재만큼 삶에 대해서 강력한 의지를 가진 적이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공포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리고 어느새 모든 것은 끝나 버렸다.

DC에서 인기리에 연재됐다고 하는 Dr.Stein을 봤다. 오랜만에 인터넷에 연재되는 만화치고는 잘 만든 만화였다. 내용이 조금 짧다는게 흠이지만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좋았다. 이 만화에서 보면 Impale형 이라는게 나와서 찾아봤더니 뾰족한 것에 찔려서 죽는 형벌을 뜻하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과거 중세시대에는 교수형이나 말에 사지를 묶은뒤 몸을 네 갈래로 찢어서 죽이는 형벌과 같은 잔인한 형벌이 난무했다. 마녀사냥은 살아있는 사람을 기둥에 묶어놓고 통채로 태워죽이지 않았던가. 이 사람들은 정말 엄청난 고통 속에 죽었을 거다. 하긴 시대가 바뀌어서 그 형태만 바뀌었지 사람들의 폭력성은 여전히 내재되어있다. 시대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개개인의 폭력을 절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같은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거지. 만약에 과거와 같은 상황이 돌아온다면 사람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괴물같은 존재다.


그나저나 느껴보지 못한 걸 표현한다는 건 참 힘든거구나...

문자와 목소리

Posted 2007. 10. 10. 04:30

 며칠전에 과외 도중 아빠한테서 전화가 세네차례 온 적이 있다. 나는 과외 중이라 계속 종료 버튼을 눌러서 전화를 끊었으나 아빠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오셨다. 마침 과외가 거의 끝날 무렵이라 아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싶어 과외를 마치자마자 급히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빠는 별 일이 있는게 아니라 그냥 내가 자다가 안 받나 싶어서 계속 전화를 했다고 하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서 화가 묻어나왔다. 하지만 이 것도 아빠의 관심이라고 생각돼서 얼른 감정을 죽이고 아빠와 통화했다.

 생각해보면 점차 예전보다 전화를 하는 횟수보다는 문자를 보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핸드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에는 문자보다는 직접 전화를 하는 일이 많았고 어른들은 거의 대부분 문자사용방법조차 잘 알지 못 하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른들조차도 문자에 이모티콘을 사용할 정도로 문자사용이 활발해졌다. 또한 중고등학생들이 한 달에 보내는 문자가 평균 2~3천여건이나 된다고 한다. 문자가 전화통화보다 손쉽고 간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문자사용이 증가하는 데에는 나의 시간이 방해받기 싫으니 나도 남의 시간을 함부로 방해하지 말자는 생각이 깔려있다.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어가면서 프라이버시를 서로 존중하자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나도 원래 내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남에게 괜히 전화했다가 중요한 일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싶어 문자를 주로 하곤 한다. 하지만 가끔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자주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사이가 아니고서는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들고 괜히 전화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상대방의 목소리가 떨떠름할 때에는 상대방이 나를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 않아 서운한 생각마저 든다.

 며칠전에 디지털 무언족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생활이 디지털화되어 가면서 필요할 때 얘기하는 것 이외에는 말 할 필요성이 사라진다는 내용이었다. 친구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메신저나 핸드폰 문자를 이용하면 되고, 지하철을 이동하면서는 혼자서 휴대기기를 이용해 동영상을 보며, 집에서는 인터넷 게임을 하다보니 말하는 데에 입을 사용할 일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기사에 심히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또, 이러다가는 꼬리뼈처럼 성대도 퇴화의 흔적으로 인체에 남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 입에 음식물 섭취의 기능이 사라진다면 입마저 퇴화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것 역시 말도 안 되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혼자 커서 그런지 혼자서 말하는 버릇이 있다. 집에서 혼자 있으면서 내가 생각한 걸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또 혼자 웃는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다들 날 이상하게 여겼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다지 정상적인 버릇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이런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서 본다면 나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라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안 그러면 아마 몇 날 며칠을 혼자서 방 안에서 있으면서 사람 목소리라고는 오로지 티비에서 떠들어대는 것만 들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문자가 생활이 되어버린 현대사회, 목소리를 상실해버린 사람들. 나는 가끔은 그립다. 말로 이야기하는 것만이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때가. 편지를 써놓고 답장을 기다리면서 설레이던 때가.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기에 이미 나는 문자와 전화와 인터넷의 편의 속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버렸다.


덧. 혼자서 말하는 버릇을 써놓고 보니 정말 좀 아니네. -_-. 요즘은 많이 안 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ㅎㅎ 난 절대 미친 사람이 아님 -_-

헛소리.

Posted 2007. 9. 2. 03:38

진실이란 무엇인가.

다수에 의한 진실
만약 집단 과대망상증에 빠진 집단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집단은 경찰이나 국가의 수뇌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외계에서 온 도마뱀이고 정체를 감추고 이 세상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런 집단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은 미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만약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도 지장을 준다면 감옥에 가거나 정신병원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절대적인 진실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키아노 리브스는 모피어스가 주는 약을 먹고 "각성"하게 되고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며 사실 자신들은 컴퓨터에 의하여 사육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 1984에서는 모든 세상이 감시체제이며 모든 사람들이 당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들은 당이 2+2=5라고 할 경우 그 것을 믿는다. 아니 믿는 척 할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런 체제에 반발하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나중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당이 말하는 슬로건부터 그들이 내뱉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공감하며 믿게 된다.

절대적 진실. 다수에 의한 진실. 그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이 질문에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대답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쉽게 답하지 못 할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모두가 믿는 것이 진실인가 아니면 하늘이 정해준 만물의 이치와 같은 진실이 존재하는가. 이는 정말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쩌면 이 세상이 창조되면서부터 정해진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고, 지구는 사과를 잡아당기기 때문에 사과는 항상 지구를 향해서 떨어진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태양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고 믿고,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으며, 사과가 지구를 잡아당긴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느 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것인가?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상의 진실
우리는 수많은 매스컴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인터넷 창을 띄우면 메인 뉴스가 우리를 사로잡으며, TV를 켜면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을 화제거리로 삼고 얘기한다. 우리는 미디어가 비춰주는 대부분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특별히 자신에게 거슬리는 내용이 아니거나,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아닌 이상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KBS에서 방영하는 미디어 포커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이였는가를 여실히 알게 된다. 이 미디어 포커스에서는 미디어 및 여러 보도매체의 왜곡된 기사를 시청자들에게 낱낱이 알려준다. 한 예로 여러 신문사(거의 조중동이다.)들이 보도했던 '국내 기업환경이 좋지 않아 많은 기업들이 외국으로 떠난다'는 기사를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중 상당수는 전혀 근거가 없는 기사이며 외국으로 떠난다고 보도된 기업이 신문사에 그 건 사실이 아니라고 통보했지만 신문사에서는 정정기사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한다. 미디어도 결국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회사이기 때문에 정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려는 경향이 있는 그들의 말을 전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권력을 잡고 있는 집단은 교묘한 정보 조작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여론을 형성하려 하며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는 내용은 다수에게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거짓과 진실이 혼합되면서 그 진위여부를 확인 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는 세상. 우리는 거짓과 진실을 어떻게 가려내야하며 그 중 어느 것을 믿어야할까. 설사 우리가 진실을 알고 있어도 세상은 내가 그 진실을 믿게끔 내버려 둘 것인가. 아마 우리가 세상에 통하지 않는 진실만을 외치다가는 갈릴레이처럼 집단에서 버려지고 그들에게 외면받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하는 비겁한 자가 되려고 하면 맘 속의 뜨거운 양심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해답은 존재한다.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은행에서 주식관련 일을 하며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이 있는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가 어느 날 집을 나간다. 그의 아내와 친척들은 주인공이 분명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을 거라며 그를 욕한다. 그리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한 사람을 보낸다. 주인공을 설득하러 간 청년은 그가 여자때문에 도망간 것이 아니라는 주인공의 말을 믿지 않으며 그러면 도대체 왜 도망갔는 묻는다. 그런 질문에 주인공은 "그림이 그리고 싶다."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날 욕해도 좋다. 난 그림이 그리고 싶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더이상 살 수가 없다." 그러한 주인공의 모습에 그를 설득하러 간 청년은 마음 속 깊이 그의 절실한 마음을 느낀다. 이 사람이 바로 훗날 반고흐와 함께 후기인상파를 이끈 폴 고갱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욕하든말든 옳고그름의 객관적인 판단과는 무관히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무언가를 추구했다. 이렇게 자신이 무언가를 절실하게 믿는다면 그 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절대적인 사실 여부, 사람들이 얼마나 믿느냐는 진실의 진위를 가려주지 않는다. 이러한 외부적 조건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며 그 것을 얼마나 절실하게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누군가가 간절한 마음으로 믿어줄 때 진실은 진정한 진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산에 가면...

Posted 2007. 8. 6. 16:11
가끔 산에 오르고 싶을 때가 있다.

카메라도 가방도 없이 홀홀단신으로 정상에 오르고 싶을 때가 있다.

오가는 사람 모두 정겨워 보일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소절이 귓가에 흘러나온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산에 오르는 순간엔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으리...


정상에서 바라본 연화는 어쩜 그리 조용할까?

그 순간에 내 마음은 음무보다 더 신비롭다.


가끔은 산에 오르고 싶다.

정철마냥 정처없이 떠나고 싶다.

-07.08.06-

명박이 아저씨 한 숨 놨네

Posted 2007. 7. 27. 15:28

오늘 오랜만에 도서관 신문자료실에서 1주일치 신문을 보는데. 신문에 나오는 얘기는 "탈레반","납치","아프간" 이런 말 뿐. 20일 이전만 해도 항상 1면 타이틀을 차지하는 건 이명박씨의 비자금 얘기가 거의 주였는데. 21일. 한국인들의 납치 사건으로 이명박씨의 얘기는 저 뒤의 5면까지 밀려났다.

한국인의 납치 사건은 국민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고(설사 이 일이 기독교인들의 과도한 선교활동에서 비롯된 거라 할 지라도.)조속히 좋은 방향으로 해결해야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 숨 돌리고 있을 이명박 아저씨가 상상되는 건 나뿐일까?

대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난 원래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니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누가 당선되도 별로 맘에 안 들 거 같다. 정말 모든 점에서 나무랄 점이 없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 나온 후보 중에 고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요즘 선거 얘기가 나오면 농담반으로 "불심으로 대동단결"같은 후보한테 올인 해줘야지 이러고 있다.

어머니가 예전에 일본이 부럽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꾼"이 있는 일본이 부럽다고 하셨다. 정말 "정치"를 잘 하는, 자기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후보가 당선되는 일본. 그 때는 그 이야기는 그리 공감되지 않았지만 점점 어머니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정말 후세에 이름을 남길만한 아우라를 지닌 후보가 나오지 않을 바에는 정치꾼이 당선되는 게 나을 것 같다.

왜 우리나라에는 나라를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쉽게 나오지 않는걸까.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그런 큰 인물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너무 과한 소망일까...

gloomy today

Posted 2007. 7. 24. 10:48

울적한 하루.

이런 날은.

방에 가서 혼자 게임을 좀 하다가.

공부하러 독서실 가서 공부하는 척 하다가 1시간 정도 자주고.

비몽사몽 간에 공상 망상 상상 좀 해주다가.

집에 와서 씻고는 이불에 폭 들어가서 한 숨 잤으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건 명확하고.

뭘 해야 될지도 명확한데.

그게 계속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고

마음 속 어디선가 말하고 있다.


적어도 학기 중엔 이런 적 거의 없었고, 있다쳐도

하루 정도면 극복됐는데.

하지만 방향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건 정말 쉬운게 아니다.


결론은 노력. 노력. 노력.




"세상은 생각하는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하는만큼 성취되는 것이다."
- 07.07.10 -

믿자.

그리고. 행하자.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자.

Sex in TV

Posted 2007. 7. 7. 01:18

 요즘 그냥 갑자기 드는 생각.

 주니아라는 섹시 노출(??) 가수를 우연히 TV에서 봤는데 장난 아님. 뮤직비디오를 찍는데 복장이 거의 19禁 수준. 그런 옷을 과연 정규방송에서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인영의 예전 복장도 좀 야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니아에 비하면 서인영은 겨울파카 입은 수준. 그래도 벗으니까 좋긴 좋아.
 그러다가 천상지희의 한 번 더 OK를 듣는데. 갑자기 머리에 스치고 간 생각.
 "이 거 뭐야. 한 번 더 하자는거야?"
 물론 가사 내용을 잘 음미하면 그런 뜻은 아니다. 밤 무도회장에서 춤 한 번 더 추자 이런 뜻인데. 내용을 좀 더 잘(?) 음미하면 한 번 더 하자 뭐 이런 식으로도 충분히 해석가능하다. 내가 변태같은 놈이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말 없지만. 이런 의도가 작사가한테 과연 없었을까?.

 예전에 케이블 TV를 보다가 우연히 외설을 그리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거기서 나온 한 화가 아줌마는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성기만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나도 저 건 진짜 너무하잖아! 싶었는데 그 아줌마가 하는 말인즉,
 "요즘 TV에 나오는 광고나 노래 등이 대부분 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게 돌려서 말하는 성적인 내용은 TV에 버젓이 나오면서 내가 하는 작품은 외설이라고 몰아붙이나."
 정말 생각해보면 그런 거 같다. 요즘 TV에서 나오는 걸 보면 '엄청 야하다'. 그리고 '굉장히 성적인 내용이 많다'. "한 번 더 OK"의 가사 내용도, "주니아의 뮤직비디오"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광고 카피들이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나도 그런 걸 보면 좋아라 한다는 것이다. 성적인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런걸까. 그냥 좋은 걸 어떻게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그 문제를 놓고 즐기기 때문에 결국 할 말이 없다. 이 모순은 어떻게 해결이 가능할까.